연구소 소개
인사의 말씀



사회이론이라고 하면, 흔히 전공자들만의 관심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생활과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통의 지평을 열어주는 기본 개념이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보는 시각과 전망이 바로 사회이론을 이끄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사회이론연구가 당장 필요한 물품을 얻게 하거나 돈을 버는 수단으로 사용되지는 않겠지만 바람직한 사회발전의 조건이나 방향을 탐색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본 연구소는 한국의 발전 경험,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역사적 변동 연구를 통하여 민중의 열망 즉, 동양의 자의식과 정체성의 생동성(生動性)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편의 얼개 안에서 소멸하기보다 오히려 사유의 밑바닥에서 죽지 않고 살아 꿈틀대는 생명력 있는 사회이론을 심도 있게 탐색하고자 합니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은 단기간에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산업화와 민주화에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자신감을 회복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 경제와 문화, 시민사회 안에는 서구의 모방과는 다른 매우 독특하고 활력 있는 발전의 잠재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학계나 언론계의 지배적 담론은 아직도 서구적 사유 패러다임에 일방적으로 편입되어 있어 우리가 겪고 있는 역동적 발전의 문법을 적절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에 닻을 내리지 못한 수입된 이념 또는 그 과정에서 변질된 이념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전통을 미화하거나 현재의 기득권에 안주하는 전망 없는 국수주의(國粹主義)가 확산될 위험도 있다고 봅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1942년 임시정부가 있던 중국 중경에서 나온 잡지 <광복> 창간호에서 그는 우리 민족의 극심한 분열을 걱정하면서 우리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갈 ‘중심이론’을 확립하자고 역설했습니다. 김구 선생의 호소는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매우 절실한 과제로 다가옵니다.


저는 1981년 서울대에서 사회이론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이제껏 이런 저런 사회참여의 경험을 했습니다. 과분하게도 능력에 비해 많은 혜택을 누렸던 제게 남겨진 소명이 있다면 초심으로 돌아가 사회이론을 발전시키는 것, 즉 이론의 눈으로 현실을 깊게 응시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중심이론을 세우는 데 미력이나마 힘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서구의 사회이론, 특히 비판이론을 전공한 학자이지만, 1987년 우리가 민주화의 돌파구를 연 이후부터는 동양의 정체성 또는 자신감으로 사회이론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것을 이룩하지 못한 저는, 이 과제를 보다 적극 추진하기 위해 이 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통념과는 달리, 사회이론은 상아탑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전공학자가 독점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의 사회이론은 시민의 참여 속에 시민과의 대화를 통해 발전합니다. 그래야만 이론이 생명력을 얻고 시대를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30여 년 간의 강의 경험과 이론의 세계적 발전 추세, 그리고 오늘의 우리 현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소통사회이론’을 확립하는 데 있다는 결론입니다. 소통이 막히면 사회는 정체되고 활력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상황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소통이 열리면 믿음이 살아나고 희망이 보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입니다만, 소통의 문제의식은 서양보다 동양에서 더 풍부하고 깊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양의 뒤를 쫓아 빠른 속도로 ‘후발’ 근대화에 몰두하는 사이, 이 문화적 전통은 유실되었거나 적어도 정치, 경제, 사회 제도의 운영에 유기적으로 접속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산업화, 민주화의 외형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정신적 빈곤과 사회분열, 권위주의의 유혹, 사회통합의 부재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론과 실천에서 소통의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 문화전통의 재구성에 관한 일이면서 동시에 오늘날 서구이론의 발전추세와도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사회이론은 시민의 참여 속에 시민과의 대화를 통해 발전합니다. 그래야만 이론이 생명력을 얻고 시대를 이끄는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조그만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배경을 말씀 드리면서 너무 큰 화두를 던진 것이 아닌가 걱정됩니다. 넓은 이해를 구합니다. 그리고 많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