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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산층의 개혁의지와 그 한계

중산층의 개혁의지와 그 한계


사회변혁의 주요과제

1980년대 후반기 한국사회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구체제의 골격은 단적으로 말해 관료적 권위주의, 종속발전의 자본주의, 남북분단으로 특징된다. 또 이로부터 변혁의 3대 목표로서 민주화, 평등화, 민족화의 3대 과제가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그 자체의 어떤 초월적 가치 때문에 중요한 게 아니라 이를 추진하는 사회세력이 신장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부상하는 것들이다.
민주화란 한국사회의 오래된 권위주의 유산에 대한 도전이면서, 정치적으로는 61년 이래의 군사정권, 특히 72년 이래의 유신체제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뜻한다. 민주화로 집약되는 변혁의 요구는 1985년 2월 총선을 통해 최초로 급격히 표출된 이후, 87년 6월의 국민적 항쟁을 거쳐 드디어 6·29선언으로 국민적 합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화운동은 오늘날 한편으로는 국민에 의한 정부선택권의 회복을 핵으로 하는 정치적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조직들의 자율성 신장을 겨냥하는 사회적 민주화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평등화는 그동안 진행된 고도성장의 부산물로 심화된 계층간·지역간·산업간 격차와 억압적 노사관계에 대한 도전으로서, 빈부격차의 해소, 균형발전, 노동3권에 의한 민주적 노사관계의 정립 등이 주요 과제이다. 최근 노동운동의 한 특징은 노동자의 교육수준과 기술수준, 생산성이 높으며 조직화가 상대적으로 용이한 대기업, 특히 중화학부문의 대기업으로부터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이다. 평등지향적 노동운동의 핵심주체는 앞으로도 산업구조의 중심에 있는 근대적인 노동계급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변적 노동집단, 농민, 도시빈민 등도 장차 조직화의 여부에 따라 또는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여론이나 이익대리표출기능을 하는 집단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 운동에 참여할 가능성은 크다고 하겠다.
민족화는 지난 40여년간 평균적인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통제해온 분단의식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고 민족간의 동질성 및 통일의 지평을 열려는 운동으로서, 자주적 민족국가의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외세와의 유착 혹은 외세의존을 강화시키는 제반 고리들을 해체시키면서 민족의 긍지와 문화적 정체성의 뿌리를 발굴·발전시키려는 다양한 노력들도 이에 포함된다. 이 운동의 중심세력은 오늘날 학생 청년세대이다. 이들의 주도하에 전후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고 기성세대가 금기로 다루고 있는 반공이념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며, 반제국주의 노선에 따른 다양한 형태의 민족운동 또는 민중문화운동이 오늘날 전개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민주화 평등화 민족화는 단순히 사회구조의 부분적 수정이 아니라 해방이후 또는 일제 때부터 내려오는 기본체제의 골격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라면서 이것의 극복을 지향하는 변혁에의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사회변혁의 주체에 관련하여 한국사회에서 그동안 자주 언급되었던 개념은 ‘민중’과 ‘중산층’이다. 공교롭게도 이 두 개념은 다 같이 어느 정도는 한국사회의 고유한 言述과정의 산물이다. 때문에 이들을 확실히 회국어로 옮기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여기서도 하나의 입장을 택하는 것은 불가피한데, 이 글의 입장은 민중을 노동자, 도시빈민, 농민으로 파악하여 중산층과 대립시키거나 중산층을 민중의 외곽에 위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중산층을 민중연합의 유기적 부분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근거로서는 민중은 변혁지향적이고 중산층은 보수적이라는 통념은 잘못되었으며 중산층에도 변혁지향성이 강하고 또 이들의 협조가 없이는 한국사회에서 민중적 변혁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 할 수 있겠다.

한국 중산층의 규모

그렇다면 그 중산층은 과연 누구인가? 여러 가지 입장의 논의가 가능하지만 간략히 필자가 해온 작업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우선 한국중산층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중산층에 관한 몇 가지 종래의 통념을 비판적으로 제거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에는 중산층을 주관적 현상으로 간주한 나머지 주관적 귀속의식만 있으면 모두 중산층이 된다는 식의 관점 또는 중산층을 수입이나 자상에 의해 규정되는 경제적 범주로 고착시키는 관점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중간계급과 중산층의 관계를 정립하는 과제였다. 흔히 중간계급=중산층이라는 묵시적 가정 하에 중산층에 관해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이것은 재검토를 요하는 문제로 비쳐졌다. 왜냐하면 계급의 실태에 대한 자료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 한국사회의 현실에서 중간계급이라고 해서 이들이 모두 자동적으로 중산층이 된다고 할 수 없고, 또 노동자계급이라고 해서 이들이 모두 자동적으로 중산층에서 빠진다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간계급과 중산층의 개념은 상호 배타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동일한 것도 아니면서 실제로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다른 기준의 개념으로 일단 이해할 필요를 느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필자가 택한 중산층의 형식요건으로는 소득, 직업, 교육, 귀속의식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중산층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에 필요한 소득과 더불어 안정된 직업이 있어야 하고 또 사리를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의 원천으로서 교육이 갖추어져야 하며 또 중산층에 속한다는 의식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4가지 요건 중 소득, 직업, 교육은 다시 객관적 기준으로, 귀속의식은 주관적 기준으로 구분하여 분석되었는데, 최종적으로는 이 기준들을 모두 동시에 충족시키는 사람(혹은 가구)만을 중산층으로 보는 방식을 택했다. 그리고 나서 중산층 구분과 계급의 구분이 이데올로기적 태도와 생활방식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였다.
측정기준을 밝히자면 소득에 관해서는 가구전체의 소득을 대상으로 하되 가구 원수별 평균소득의 75% 이상을 최소한의 중산층 기준으로 하였고, 직업에 관해서는 임시고, 일고, 무직을 제외한 모든 상용고, 자영업자, 고용주를 포함하였다. 교육에 관해서는 연령별로 차등있는 기중을 적용하여 가구주가 20대인 경우에는 최소한 고졸이상을, 30대이면 중졸이상을 그리고 40대 이상이면 교육을 무시하는 방식을 택했다. 분석자료로는 1981년과 86년에 실시된 경제기획원의 사회통계자료중에서 농가를 제외한 비농가 가구(약1만 7000가구)의 자료를 사용하였는데, 최종결과를 보면 1986년 현재 객관적 기준과 주관적 기준을 모두 충족시킨 중산층의 규모는 비농가 가구의 35%에 해당한 것으로 나왔다. 이것은 81년의 27%로부터 약 8% 증가한 것이다. 더 나아가 이들 중산층의 사회적 구성을 계급별로 살펴보면, 통상 화이트칼라로 이해된 신중간계급의 경우에는 약 70%가 중산층에 포함되는데 이 비율은 전문직의 경우에는 더 높다. 한편 통상 자영업주로 구성되는 구중간계급은 오직 41%만이 중산층에 포함될 뿐이다. 그런가 하면 육체노동을 하는 노동자계급은 상위 약 20%가 중산층에 포함된 것으로 나타났다.

중산층의 이데올로기적 다양성

중산층의 사회적 구성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을 내부적으로 통합된 행동의 주체로 보기는 사실상 어렵다. 오히려 상당한 이질성과 분절화의 경향이 그 안에 발견된다. 비슷한 예로, 필자의 자료를 분석해보면 노사분규에 관하여 신중산층은 노동억압적 정부정책과 이에 편승한 사용자에 대한 강한 비판의식을 보이는데 반해, 구중산층은 반대로 노동자를 비판하는 경향이 높다. 한편 노동중산층은 신중산층의 성격을 강하게 공유하는 반면, 중산층으로부터 탈락한 하류 구중간계급의 의식은 현저히 노동자화 되는 경향을 보인다.
다른 하나의 보기로 상류층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도 한국중산층은 한편으로는 변혁지향적 면모를 뚜렷이 보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구중산층은 체제 유착적 보수적 성향을 증가시키는 면이 있다. 흔히 일반적 명제로서 언급되는 중산층의 양면성은 한국 사회의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마치 중산층의 무분별한 기회주의적 속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양면성에도 불구하고 한국중산층의 성격에는 오늘날 사고와 행동의 면에서 방향성이 있는 집합적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중산층은 지난 20여년간 지속된 산업화의 산물이다. 그런 만큼 이들은 산업화의 혜택을 실제로 받은 층이다. 이들은 직업과 수입의 면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다. 바로 이 면에서 그들은 보수화될 가능성도 있으나, 반대로 어느 정도 생활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보다 인간다운 사회, 인권이 존중되고 억압과 강제가 사라지는 사회, 누구나 떳떳하고 공평하게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민주사회에 대한 갈망이 커질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권위주의의 현실에서 보자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덧붙여 한국중산층은 높은 교육수준을 공유하고 있다. 중산층의 절대다수는 이미 고졸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거니와 그 핵심인 신중산층의 경우에는 대졸 이상의 학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신중산층 가운데서도 특히 그 전위에 있는 지식인, 문화인, 언론인, 종교인,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의 경우에는 절대 다수가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국중산층은 원래 높은 교육수준의 영향도 있지만, 이들 전위적 신중산층의 활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사회문제에 대한 강한 비판적 의식을 넓게 공유하게 된 것이다.

사회변혁과 중산층의 역할

이 점을 배후에 전제하면서 이제 서두에서 언급했던 한국사회의 변혁에 작용하는 중산층의 역할을 간략히 조명해 보겠다. 변혁운동에 참여하는 주요세력으로는 연령에 근거한 청년세대, 계급에 근거한 근대적 노동계급, 그리고 중산층을 들 수 있다. 물론 이외의 세력도 참여할 수 있겠지만,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은 이들 세 축의 세력들이 중심을 이룰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서 중산층의 역할은 다소 특이한 면이 있는데, 이들이 변혁의 주도세력으로 직접 작용하는 면도 있지만 다른 세력에 의한 변혁운동이 지나친 양극화로 질주하지 않도록 이를 중심으로 모아 국민대중의 지지와 협력을 얻어내는 접합의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의 민주화운동은 이 점을 잘 보여준다. 중산층은 그 성격상 급진주의를 지지하기는 힘들지만, 권위주의의 현실에서 이들이 민주화를 원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다. 즉 중산층이 70년대 이래의 반성적 학습을 통해 민주화의 추진세력으로 성장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흥미로운 것은 민주화를 둘러싼 양극적 대결상황이-중산층이 민주화 운동에 대거 참여함으로 인해-선거를 통한 경쟁상황으로 질적 전환을 한 데 있다. 즉 87년 6월의 경험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듯이, 체제변혁을 줄기차게 요구해온 학생 청년세대의 민주화 운동을 중산층이 적극 지원함으로써 이들의 투쟁노선을 온건화시키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이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더욱 중심으로 확대시켜 모으는 접합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6·29선언으로 표현된 민주화의 돌파국면은 이렇게 해서 뚫린 것이다.
한국 중산층은 이처럼 정치적·사회적 민주화를 추진하는 세력으로 오늘날 변모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기존정당이나 정치집단에 대한 만족은 아직 낮은 셈이다. 이들은 군사체제의 종언을 위해 야권의 진정한 단합을 원하지만, 기존 정치 집단 및 지도자의 행태는 상당히 이합집산이 강하고 구태의연하다. 특히 신중산층의 탄력 있는 현실인식과 윤리적 요구에 부응하기에는 이들의 행태가 구시대적 권모술수에 능할 뿐이다. 이러한 내재적 불만이 있지만 현대 한국사회의 첫 번째 특징인 민주화의 과정은 결국 중산층의 지도력 하에, 또 국민적 호응에 힙 입어 전전하리라 전망해 볼 수 있다.
두 번째의 과제인 평등화에 관해서는 전망이 이처럼 밝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어두운 것도 아니다. 중산층은 대체로 노동 3권의 보장과 이를 통한 노사관계의 민주화를 적극 지지하고 또 빈부격차의 개선을 원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또 이를 위해 상류층이 과도하게 독점하고 있는 부의 사회적 재분배를 주장하는 것으로 조사결과들은 보고하고 있다. 다른 한편 중산층은 노동운동이 급진적 투쟁노선으로 장기화되거나 혹은 중산층의 희생 위에 노동문제가 개선되는 것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중산층은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노동운동을 지지하면서도 이것의 급진화, 폭력화를 경계하는 양면성을 갖는다. 그러나 근래 노사분규의 양상을 보면, 한국사회에서 신중산층과 산업구조의 중심에 있는 근대적 노동자계급 사이에는 이미 우호적인 연합의 관계가 성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사회여론을 이끌어 가는 신중산층이 노동자의 변혁요구를 지지하고 수용함으로써 중심화를 통한 구조개혁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억압적 관계 대신 공존적 노사관계가 발전할 것이며, 이런 제도적 틀 안에서 근대적 산업부문의 노동계급은 점차 중산층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회변혁에 관해 중산층이 갖는 가장 심각한 한계는 세 번째의 민족화를 둘러싼 쟁점들에서 나타난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청년세대와 중산층의 사고방식 사이에는 좀처럼 쉽게 넘기 어려운 간격이 오늘날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문제, 통일문제에 대한 청년세대의 이념적 지향이 모든 고정관념들을 매우 빠른 속도로 허물어뜨리면서 기성세대에게 터부시되어 있는 방향으로 질주하는데 반해, 중산층의 인식은 아직 대체로 분단의식에 매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한국사회가 앞으로 전환기적 상황을 끝까지 무난히 관리해 나가는데 어려움을 줄 복병의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동덕여대학보(1987년 11월 31일, 한상진)


   변혁주체, 민중(民衆)이냐 중산층(中産層)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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